최진영


1. 레이오버에 오기 직전 3개월의 생활이 궁금해요.


올해 초에는 석사 학위 청구전을 마치고 논문을 마무리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2년간의 공부를 마무리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정리할 일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심적으로 여유가 생기던 때이기도 해서 그동안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리고 드디어 올해 1월에는 11월에 제작한 책 『캐노피』를 사쿠라지마로 보낼 수 있었어요! 가장 아끼는 편지지에 꼬불꼬불하고 어설프게 쓴 일본어 편지를 비지터 센터에서 일하는 아야상에게 함께 보냈어요. 며칠 뒤 메일로 회신이 왔는데 정말 기쁘더라고요.


2. 이전에 제주에 온 적 있는지, 있다면 주로 무얼 하셨나요?


서울에서 만나기 힘든 자연의 모습을 보러 왔던 것 같아요. 그 풍경과 어우러진 미술관을 찾거나, 돌담으로 쌓은 집들을 보고, 좁을 골목을 걷는 것 모두 정말 즐거웠어요.


3. 바다 가까이에서 지내본 적이 있나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캐노피를 지으며 사쿠라지마에 체류했을 때 골목만 나가면 바다였어요. 한창 더웠던 7월이었고, 바다에는 하얗고 작은 배들과 가끔 낚시하는 분들이 보였어요. 종종 해가 저물 때쯤 세븐일레븐에서 도시락을 사서 페리 터미널 벤치에 앉아 석양과 조명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페리를 바라보며 저녁을 먹었어요. 그 순간을 너무 좋아했어요.


4. 레이오버 최장기간인 31일동안 제주에 체류하셨는데, 특별했던 점이 있나요?

네! 만약 체류 기간이 더 짧았다면,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긴장과 압박을 느꼈을 것 같아요. 그로 인해 돌아갈 때 아쉬움도 더 컸을 것 같고요.
가장 특별했던 점은 획일한 목표나 성공, 실패 없는 시간을 보낸 것이 어색하면서도 행복했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하려고 결심하면 무자비한 날씨로 인해 계획이 틀어지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히려 그런 정지의 순간이 저에게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려던 것을 못하게 되면서 다른 것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단순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유진, 혜송, 효정, 누리님과 나누었던 모든 시간들이 참 즐거웠어요. 사소한 일들이었지만, 계획이나 목표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외부의 개입을 받아들이는 경험이 내면에 변화를 준 것 같아요. 그 점이 개인적으로 의미있고 행복하게 느껴졌습니다.
체류 마지막 날까지 눈을 뜨면 보이던 깨끗한 도화지 같은 객실과 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 그리고 레이오버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5. 31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있나요?


떠나기 직전쯤이었는데, 공항 근처 '마록당'이라는 찻집에 간 날이 생각나요. 지도상에 리뷰나 운영 시간이 적혀 있지 않아 알쏭달쏭했지만 왠지 근사한 찻자리가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방문 전에 전화를 드렸더니 사장님께서 "네, 오세요. 마침 저도 차를 마시고 싶었습니다."라고 상냥하게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방문해보니 공간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층에는 찻자리와 방대한 양의 보이차, 그리고 각종 도구들이 있었어요. 2층은 올라가 보지 못했지만 사장님의 개인 작업실처럼 보였어요.
제주에 머무는 동안 여러 찻집을 방문했는데, 팽주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관광지인 경우가 많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티 코스 위주라 조금 형식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고요. 그런데 마록당에서는 차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충분히 물어볼 수 있었고, 팽주님의 경험도 들으며 아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다양한 차를 음미했어요.
팽주님은 중국으로 차 여행을 가실 때 기존 거래처를 방문하기도 하지만, 워크인으로 새로운 찻집들을 찾아다니며 거래처를 만들어 오신다고 했어요. 그런 예고 없는 방문이 특히 설렌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표정에서 저와 세대는 달라도 비슷한 종류의 설렘과 즐거움을 가지고 계시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 점이 저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서로 같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만난다는 느낌도 들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도 해보고, 찻집 근처 좋아하는 동네 식당에 데려다주시기도 하며 따듯한 시간을 보냈어요. 이날의 만남이 사쿠라지마에서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고, 제가 여행하며 늘 바라는 친밀한 경험이라 아직 생생히 기억납니다.


6. 일본 남부 사쿠라지마를 배경으로 한 책 『캐노피』 잘 읽었어요. 사쿠라지마와 제주도의 닮은 점, 그리고 다른 점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지형적인 공통점이 많을 것 같아요. 두 곳 모두 중앙에 장엄한 화산을 품고 있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거든요.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현재 활동이 없는 한라산을 품고 있는 제주는 그만큼 안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서울보다 크기도 약 3배 정도 커서 바다에 둘러싸인 도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그에 비해 사쿠라지마는 규모도 훨씬 작고, 하루에도 여러 번 분출하는 활화산을 품고 있어서인지 주민들과 화산의 관계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화산을 티격태격해도 매일 함께 지내는 엄마 같다고 표현하신 분도 계셨고요. 제가 느끼기에 사쿠라지마의 화산은 주민들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특별한 생동감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7. 레이오버 기간동안 가장 중요했던 것이 있을까요?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만남들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몰랐던 것들을 경험하고, 듣고 알아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것들을 지금 제가 있는 서울로 소중히 가져와서 그 당시의 시간과 현재를 이어붙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8. 평소에 미루고 있는 일이 있나요? 몇 년 동안 생각만 하고 있는..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니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몇 년을 미룬다는 건 저에게 하기 싫은 일일 텐데, 그렇다면 아마 하지 않을 것 같아요 💔 다만 앞으로 몇 년간 계속 생각하게 될 일은 생겼어요. 작고 다정하면서 멋있는 찻집을 차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9. 레이오버 기간 동안 ‘경유지’에 대한 정의나 생각이 달라졌나요?


너--무. 레이오버 전에는 경유지를 떠올리면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 외에는 없었어요. 경유지를 생각하면 감정적으로는 답답함과 공허함, 그리고 약간의 불안함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지금은 경유지 그 자체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종종 이번 경험처럼 경유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지내고 싶어요.


10.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올해 여름까지 즐거운 일들이 많이 예정되어 있어요. 곧 하동으로 차 여행을 가서 한국의 햇차와 야생차를 많이 접해보고 오려고 해요. 그 후에는 하동에서 데려온 찻잎으로 5월 5일 버드콜 DIY 마켓에서 처음으로 개인 차 자리를 열 예정이에요. 이후에는 버드콜에서 차를 매개로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보려고 하고요. 6월에는 ‘프렉션’을 운영하는 디자이너 이름님과 함께 상하이 북페어에 참가할 예정이에요. 상하이에서 또 어떤 일들이 생길지 기대하고 있어요.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 여름이 가기 전에 하동에 잠시 머물며 차밭에서 봉사를 해보려고 해요.
그리고 서촌 모호 스페이스를 운영하는 모호님의 비닐하우스 밭에 가서 염색과 관련된 실험도 진행해보려고 해요. 레이오버로 솔트에 머물며 진행했던 감물 염색 과정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는 색을 지켜보는 일이 무척 즐거웠거든요. 그래서 모호님 밭의 다양한 작물들을 활용해 실험해보기로 했어요. 식물이나 과일에 있는 '탄닌'이라는 성분이 색을 낸다고 알고 있는데, 찻잎에도 탄닌 성분이 많거든요. 그래서 이걸 활용한 염색도 시도해보려고 해요!
이렇게 배운 것들을 디자인으로 번역하는 것까지 이어가고 싶어요. 아직 예정된 작업은 많지 않지만, 앞으로 더 다양한 디자인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 중 누군가 이상하고 재미있는 일로 연락주시면 좋겠어요.





*이 인터뷰는 레이오버 종료 1개월 후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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